베토벤 교향곡 음악이야기


1. 1988년

88년도였다. 레코드 가게에서 각종 노래를 테이프에 복사해 팔기도 했다. 음반 가게 주인과 시장 정서가 반영된 순수 가내수공업 불법복제테이프(?)였다. 정품을 선호했지만, 꽤 구미를 당기는 음반가게표 테이프들도 있었다.

예쁜 박스 속에 매직으로 정성들여 쓴 복제 테이프들이 즐비했는데, 그 중 눈에 띠는 음반이 있었다. 클래식 음악만 모아놓은 편집 테이프였다. 그 테이프에는 베토벤, 모차르트, 차이코프스키 등을 비롯해 이름 모를 장인들의 유명한 악장들이 선별돼 있었다.

나를 클래식의 세계로 이끈 음반이었다. 익숙한 곡도 있었고, 처음 듣지만 매력적인 곡도 있었다. 보물 같이 여기며 듣고 또 들었다. 나중에는 테이프가 늘어나 똑같은 테이프로 다시 사기도 했다.

예민한 사춘기 극장에서 클래식 테이프에서 듣던 노래들이 나오면 형제처럼 반가웠다.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키딩 선생이 휘파람으로 불었던 「1812년 서곡」, 〈다이 하드 2〉에 삽입된 시벨리우스의 「핀란디아」는 왠지 모를 뿌듯함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게 끝이었다. 10대 끝 무렵, 연미복으로 대표되는 그들의 음악이 기성세대를 꼭 닮아 거부감이 들었다. 새로운 사랑을 찾았고, 종착지는 동아기획의 음반들과 헤비메탈이었다.

김광석의 노래처럼 세월이 흘러 중학생 소년은 가장이 됐다. 생이 무거워진 나이고, 몸과 정신은 제도와 관계에 갇혀버렸다. 아부와 아첨을 일삼고, 때로는 고함치기도 한다. 숙취로 게운 다음 날, 거울을 보니 어느새 배나온 꼰대가 서 있다. 나도 어른이 된 것이다. 클래식을 다시 찾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찾은 건 유년 시절의 그때 큰 감동을 줬던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이었다. 유투브를 헤매고, 여러 버전들을 들었지만 뼛속까지 각인됐던 그때의 9번이 아니었다. 알지도 못하던 푸르트뱅글러를 듣는 날, 4악장에서 그때의 빛나던 순간이 재생됐다. 어린 날 들었던 그 곡이었다. 그날 이후 베토벤 교향곡을 수험생처럼 열심히 듣고 있다.


2. 2014년

푸르트뱅글러가 지휘한 9번 교향곡은 내 음악 편력을 바꿔놓았다. 사실 몇 년 전만 해도 클라이버의 교향곡 5, 7번을 사놓고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지금에서는 사길 잘했다는 안도감이 인다. 클래식에 빠진 지금 CD 한 장 값이 아쉽다.

베토벤의 5, 7, 9번을 들으니 전작주의 지병이 도진다. 다른 교향곡들은 어떨까, 궁금증을 참기 힘들다. 베토벤 교향곡을 전집으로 채울까, 낱장으로 이를 맞출까. 하루에도 몇 번씩 선택과 포기를 되풀이한다.

기왕 낱장으로 시작했으니, 가장 유명한 연주로 채우자고 작정한다. 하지만 막상 사려니 추천이 다르고, 기준 또한 애매모호했다. 대중음악처럼 누구의 몇 집이 명반이다, 라는 정의가 성립되지 않는 동네였다.

이럴 때는 단순하게 다수결의 원칙이다. 득표율 높은 순위대로 구입하자고 마음먹는다. 책과 클래식 사이트 등을 찾아 비교하며 추려낸다. 힘든 작업의 끝, 근 넉달 간 베토벤의 교향곡을 1번부터 9번까지 모으다.

장원은 카를로스 클라이버였다. 그의 재기발랄한 향연에서 헤어 나올 수 없었다. 존재도 몰랐던 4번과 7번에 흠뻑 빠져 몇날을 들어도 아까웠다. 근래에는 아바도의 7번이 사랑스럽다. 결국 가장 유명한 버전으로 한 장씩만 소유하지는 다짐은 남들처럼 망상이 되었다. 지휘자 따라, 연주자 따라 개성과 해석이 다르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 나이에 클래식 세계로 이끈 1등 공신은 KBS FM 클래식 방송이었고, 2등 공신은 강헌의 벙커원 특강, 확인사살은 남우선의 『나쁜 음악 보고서』였다. 이들에게 말 많은 애증을 표한다.



덧글

  • 다음엇지 2014/06/25 11:09 # 답글

    ^___^;; 비엣또벤 교향곡은 생각할 수 있는 해석들은 거의 다 나온 것 같아서 본인의 취향을 확인하는 척도가 되기도 하죠. 그럼에도 치열하게 새롭게 혹은 원전에 가깝게 해석하려는 사람들 때문에 헤어나올 수 없는...
  • 음반수집가 2014/06/26 00:08 #

    본이의 취향을 확인하는 척도, 라는 말씀이 급하게 들어옵니다.
    언제고 저를 확인할 수 있겠군요. ^^
  • hohorian 2014/06/25 13:59 # 답글

    낱장으로 모으셨네요! 이제 박스 전집을 사실 차례 입니다!!

    프리차이 9번이 보이네요. 늘 가격도 적당하고 평도 좋아 관심을 끊지 못하겠습니다. 어떤가요?
  • 음반수집가 2014/06/26 00:09 #

    1. 겨우 갖췄는데도 박스에 대한 탐욕을 접기가 쉽지 않습니다. ㅠㅠ

    2. 지금의 베필과 다르더군요. 아주 날렵하고 민첩합니다. 카라얀과는 아주 맛이 달랐습니다.
  • 루루카 2014/06/25 14:20 # 답글

    저도 가장 처음으로 샀던 CD가 베토벤 9번 교향곡이었죠. (카라얀 지휘)
    어제 밤에 참 오랫만에 1, 2번 고향곡(카라얀 골드 레이블) 듣고 잤었는데, 포스팅을 보니 반갑네요~
  • 음반수집가 2014/06/26 00:10 #

    저는 오늘 아침 출근길에 1, 2번 카라얀 골드 버전으로 들었습니다. ^^
    동시대에 여전히 통용되는군요. 저도 반갑습니다.
  • 2014/06/25 15:15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4/06/26 00:11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Erato1901 2014/06/25 15:45 # 답글

    베토벤 교향곡이라.... 제가 18세부터 약 20여년간 음반수집을 ( 저도 수집가입니다) 하고 있는데요. 98프로가 클래식음악임에도 베토벤 교향곡은 딱 두개 뿐이네요. 말씀하신 클라이버 것도 그냥 저렴한 가격이어서 샀고 그리고 칼뵘의 6번을 제외하고는 없네요... 아 그러다가 작년즈음에는 그래도 클래식음악듣는 사람이 베토벤 교향곡 하나는 있어야 할텐데 생각하면서 이거저거 생각하다가 누가 저에게 음반추천하거나 음반추천 부탁할때 쓰는 룰을 적용했죠

    - 제일유명한 음반 그리고 구하기 쉬운 음반. 그래서 내린 결론이 카라얀의 emi 전집 되겠습니다. emi 전집을 고른 이유는 카라얀 emi가 독특한 케이스이고, 좀더 저렴하고 해서 샀죠.

    - 나중에 저는 카라얀 Dg 노란딱지 전집만 구할 예정이랍니다.

    이글 보니 저의 음악감상사가 떠올라서 트랙백을 해볼게요...
  • 음반수집가 2014/06/26 00:11 #

    글 기다리겠습니다. ^^
  • 어헣↗ 2014/06/25 20:59 # 답글

    오늘 클라이버 5, 7번 음반을 샀는데.. 이 포스팅이 반가워서 댓글 남깁니다~
    클래식 문외한에 감상할 줄도 잘 모르지만 저는 아바도 9번이 그렇게 좋더라구요.
    아바도 7번이 괜찮다고 하시니 아바도 7번 앨범도 기회될 때 구입해봐야겠습니다.
  • 음반수집가 2014/06/26 00:12 #

    클래식 명반에는 정답이 없다 하네요. ^^
    개인마다 다를 수밖에 없을 것 같고요.

    탐욕이 있지만 어떤 음반이든 힘빼고 즐기려고 합니다.
  • 황씨 아저씨 2014/06/26 00:21 # 답글

    귄터 반트가 지휘한 베토벤 교향곡 전집도 꽤 좋던데요.
    요즘에도 구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 음반수집가 2014/06/26 09:15 #

    1. 이글루 동지들이 대부분 떠났더군요. 10년을 여기에서 계속 만나네요. ^^

    2. 반트의 앨범은 낱장으로 보이더군요. 조금 참겠습니다. ㅠㅠ
  • rumic71 2014/07/05 15:07 # 답글

    * 클라이버 4번이면 빨간 오르페오인가요? 그거 좀 비쌌죠...
    * 저는 아바도/빈필의 9번을 매우 선호합니다. 스테레오 중에서는...
    * 제가 베토벤 듣게 된 계기가 <푸>선생의 47년 5번 녹음이었습니다. 말씀하신 9번은 몇년도 녹음인지 궁금해지네요.
    * 6번은 개인취향이 많이 작용할 성 싶은데(다른 건 안그러나?) 저는 무조건 칼 뵘/빈 필입니다. 하지만 정작 이 음반은 아끼느라 잘 안 듣는다는 게 함정. 그 외엔 크립스나 슈미트-이세르슈테트의 6번을 자주 듣는 편이군요
    * 반트는 아직 구매하진 않았지만 몇 차례인가 들어봤는데...얼굴 사진과 딱 맞아떨어지는 연주랄까요.
  • 음반수집가 2014/07/07 18:34 #

    1. 예 오르페오반입니다. 상대적(?)으로 비싸다고 할 수 있네요. ㅠ

    2. 말씀하신 음반은 지금에서 구할 길 없더군요.

    3. 51년 EMI반입니다.

    4. 전원 아직도 친해지려고 작업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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