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촌블루스 : 내 인생의 해방구 음악이야기


갈 길 잃은 봄에 신촌블루스가 다시 찾아왔다. 거부할 수 없었다. 신촌블루스는 지구의 단면과 같다. 잘라서 봐야지, 원류부터 헤아리면 한국 대중음악 전체를 탐구해야 한다.

70년대를 버텼던 이정선은 그렇다 해도, 주류를 뚫고 다니던 엄인호는 어떻게 묘사해야 하나. 엄인호의 여인들이 내뿜었던 관능과 절정에 있었던 김현식은 어찌할꼬. 서술이 불가하다.

신촌블루스의 시작인 이정선과 엄인호의 결합은 괴이했다. 반듯하고 정확한 이정선과 막치고 자유스런 엄인호의 결합은 보편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한국 블루스를 꿈 꾼 두 기타리스트의 서로 다른 이야기는 위험했지만 의외의 성과물을 만들어낸다.

1988년 발표한 이들의 『1집』은 이미 완숙하고 노련한 기획물이었다. 과잉됐지만 풍부했고, 거칠었지만 섬세했다. 흩어진 노래 속에 십 수 년 쌓은 두 남자의 공력을 유감없이 담아냈다.

한때 신중현의 남자였던 박인수는 「나그네의 옛 이야기」와 「봄비」를 통해 잊혀진 그의 존재감을 증명했고, 이정선과 엄인호의 다시 부르기는 과거의 부유물을 민주화가 출현한 이 땅에 드디어 정착시킨다. 특히 이정선이 「한밤중에」에서 펼친 기타의 향연은 68년 화이트앨범의 에릭 클랩튼처럼 지금도 유효하다.

일회성으로 끝날 것 같았던 이정선과 엄인호의 작업은 〈동아기획〉으로 자리를 옮겨 1989년 신촌블루스 『2집』에 이른다. 『2집』은 더욱 능수능란해졌으며, 여유로운 질감까지 갖추게 된다. 장원은 무엇으로도 부정할 수 없는 김현식이었다. 김현식은 「골목길」과 「환상」에서 그의 생애를 통틀어 보컬리스트가 보여줄 수 있는 최대치를 보여주며, 사람과 노래가 합일되는 경이로운 순간을 연출한다. 한국 대중음악이 만개한 순간이었다.

그러나 신촌블루스의 절정기는 오래가지 못한다. 이정선의 탈퇴와 맞물려 엄인호가 홀로 주도한 『3집』은 안정화에는 성공하지만, 이정선과 주고받던 기분 좋은 긴장감과 뒷힘을 잃고 만다. 더욱이 애처로운 건 절정을 보였던 김현식이 「이별의 종착역」으로 자신을 조사(弔詞)하며 세상을 떠난 점이다.

1992년 발표한 신촌블루스 『4집』은 『3집』의 안주와 김현식의 부재를 넘어서고자 한 엄인호 욕망의 결정체였다. 엄인호는 김형철을 통해 김현식을 부활시키려 했고, 그의 역사상 가장 강렬한 연주를 담아낸다.

여기까지였다. 김현식은 하늘로 떠났고, 이정선과 엄인호는 각자의 길로 나누어졌다. 1990년 이후 신촌블루스는 엄인호의 변방이 되었고, 빛나던 순간은 역사로만 기억되었다.

2013년 어느 날 반가운 소식이 들린다. 신촌블루스의 전부이기도 했던 이정선과 엄인호가 『신촌블루스 포에버』라는 새 음반을 LP로 발표한다고 한다. 기억이 재생된다.

철저하게 고립됐던 10대 후반, 신촌 블루스는 어느 헤비메탈보다도 강력했고, 교실 밖으로 탈출하는 해방구였다. 시름이 깊어진 봄, 신촌블루스가 신화 속의 그처럼 다시 손을 내민다. 부여잡고 오랜만에 가면을 벗어본다.




덧글

  • 신군 2013/05/29 18:49 # 삭제 답글

    1980년대 중반께 방송된 '만능소년 빌리'라는 만화에 거의 매 회마다 이정선의 노래들이 흘러나왔었죠

    같은 노래가 반복해서 나온게 아니라 조금씩 다른 노래들이었던 것 같은데

    그걸 다 작곡을 했던건지 즉흥곡이었던건지.

    암튼간에 색다른 체험이었습니다.

    뭐 꼬맹이였던 그 시절에는 이 아저씨 뭔가 이상한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만. ㅋㅋㅋ
  • 음반수집가 2013/05/31 00:03 #

    빌리라는 만화 말씀 들으니 봤던 것 같기도 한데, 확실하지 않네요~

    이정선의 노래 언급은 말씀처럼 색다른데요.

    언제고 다시 볼 날이 오겠죠. ㅋ~
  • 스래쉬 2013/06/11 21:45 #

    80년대에 kbs을 통해 방송 되었던 만화 영화들에서 이정선 아저씨를 노래를 들었던 기억을 저만 가지고 있었던게 아니였네요. 빌리도 그렇치만 뭐 한 동안 여러편에 이정선 아저씨의 노래가 나왔지요. 거기 나온 노래들만 모아서 음반이 하나 나왔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 음반수집가 2013/07/02 18:58 #

    스래쉬님도 연배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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