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홀 : 대한민국을 노래한 명장 음악이야기


재수할 때 실용음악과에 진학하려던 형이 있었다. 그 형은 소위 딴따라였고 시니컬한 모습으로 언제나 음악 이야기를 하고 다녔다. 어느 날 헬로윈을 부르는 나에게, 락밴드 오디션 때 가장 많이 불리는 노래가 세 곡 있는데 아냐고 물었다. 내가 알 리가 있나. 70년을 산 표정으로 모른다고 대답했다.

나보다 더 늙은 모습으로 그 형은 조하문의 「내 아픔 아시는 당신께」, 헬로윈의 「A Tale That Wasn't Right」, 마지막으로 블랙홀의 「깊은 밤의 서정곡」이라고 읊조렸다. 동의 여부를 떠나 조하문과 헬로윈은 알겠는데, 블랙홀은 생소했다. 1993년, 블랙홀과 그렇게 만났다.

블랙홀에 대한 여러 수식이 있지만, 가장 와 닿는 구절은 “양심을 속이지 않는 상식적인 행동”을 하고 싶다는 주상균의 말이다. 지당한데, 행동은 어렵다.

양심을 속이지 않는다는 것, 이거 참 애매하다. 아침 출근 버스에서 여인의 각선미를 힐끔거리며 정신 줄을 놓기도 하고, 거리에서 침 뱉고 무단횡단을 일삼기도 한다. 나는 결혼을 했어, 애들이 보고 있어, 그러면 안 돼를 되뇌여도 눈과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공교육의 성과는 교과서 말을 잘 듣고, 부조리한 권력에 약한 족속을 만들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블랙홀은 부조리에 대해 저항했고 표출했다. 그러니 블랙홀이 위대할 수밖에.

블랙홀은 한국 헤비메탈의 절정기였던 1989년 첫 앨범을 발표했다.『1집 : Miracle』은 메탈 키드의 데뷔앨범으로 치부하기엔 만만치 않았다.

서정성의 극치였던 「깊은 밤의 서정곡」은 광주 민주화 운동 이후 사회에서 부딪쳤던 부분에 대한 괴로움을 토로한 곡이고, 「밀납 인형」은 5공 정치인, 「Rock It」은 획일화된 라디오 방송에 대한 불만을 표출한 노래였다.

록은 저항이라고 말을 하지만 실상 부조리를 노래하는 록밴드는 얼마 되지 않는다. 블랙홀의 시작은 양심의 행동이었고, 지금까지 한결 같다.

1991년 발표한 『2집 : Survive』는 한국 헤비메탈을 10년 앞당긴 투톱 「바벨탑의 전설」과 「녹두꽃 필 때에」가 담겨 있다. 노래도 훌륭하지만, 두 곡이 대변하는 현실 비판과 역사 고찰은 이후 전개될 블랙홀 음악의 지향점을 보여준다.

또 하나의 명곡 「Mother Nature」는 공일오비의 「적 녹색인생」과 더불어 90년대 환경 파괴를 고발했고, 향후 『7집』의 「끝과 시작」으로 진보한다.

3년 후 발매된 『3집 : 잃어버린 신화』는 이미 『2집』부터 손발을 맞춘 주상균, 정병희, 김응윤의 호흡이 절정에 달하며 명반 『4집』을 예고한다. 비록 『3집』이 상업적으로는 실패했지만, 한국에서 누구도 실현하지 못했던 멜로딕 스피드 메탈이라는 장르를 토착화시킨다.

1995년, 블랙홀 최고의 명반 『4집 : Made In Korea』가 탄생한다. 『4집』은 고대부터 현재까지의 역사와 그 역사로 인한 폐해를 그린 작품이다. 백제, 동학, 5․18, 지역 갈등, 남북통일 등 우리 역사의 병리 현상과 고대의 미학을 속주와 서정이라는 두 가지 어법으로 전개해낸다.

『4집』이 한국사를 그렸다면 또 다른 명작 『5집 : City Life Story』는 한국 사회의 소외받은 이들에 대한 생생한 보고서다. 「바람을 타고」의 폭주족은 88만원 세대로 변모했고, 「앵벌들의 합창」, 「포커페이스」, 「낙원 탈출」은 지금도 변함없는 날 것 그대로의 진행형이다.


블랙홀은 『1집』부터 『5집』까지 일관되게 현실참여와 더불어 우리의 서정성을 노래했고, 문법은 강력한 헤비메탈이었다. 쉼 없이 달려온 그들은 1997년 『Best Of Best』를 통해 전사(前史)를 정리한 후, 곧이어 발표한 『6집 : My Way』에서 록키드였던 순수의 시대를 돌아본다.

새 세기가 시작된 2000년에 발매한 『7집 : Seven Signs』는 소름 끼치도록 앞서간 앨범이었다. 반토건과 생태를 외치는 우석훈이라면 쌍수 들고 환영할 만한 명작으로, 「끝과 시작」은 4대강 사업에 죽어간 강의 진혼가로 쓰여도 무방하다. 김수영이 쓰고 싶어 하던 ‘10년을 내다본 시’가 블랙홀을 통해 실현된 것이다.

『7집』이 그렸던 일곱 가지 죄악은 『8집 : Hero』에 담긴 한으로 승화된다. 『8집』은 국악과 결합하며 한국적 깊이를 담보했고, 판소리와 트로트까지 접근하며 철저하게 한국산 메탈을 고수했던 명예로운 자기증명서이기도 하다.

2000년대 음반 시장의 몰락은 블랙홀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블랙홀은 음반 포맷을 고수하기 보다는 유연하게 디지털싱글이라는 시대 조류와 타협하며 창작의 끈을 놓지 않는다.

2006년 「Victory Korea」를 시작으로, 2007년 한국 근대사를 정리한 「공생관계」의 번외 버전 「一刀歌(일도가)」, 2008년 이명박을 정면에서 비판한 「라이어(Liar)」, 2009년 정권의 하수인으로 전락한 언론에 일침을 놓은 「The Press, Depress」를 연달아 발표하며 양심을 곧추세운다. 2008년 촛불 이래 블랙홀처럼 2MB 정권에 맞서 “양심을 속이지 않는 상식적인 행동”을 한 음악인은 많지 않다.

20년 넘게 일관된 음악을 한다는 건 한국에서 사실상 힘겹다. 블랙홀은 철저히 비주류였던 헤비메탈이라는 면류관을 쓰고 한 장르 안에서 한국이라는 복합체를 모색했다. 그들은 대한민국의 부조리와 어두운 역사를 노래했고, 위로와 고락이 필요한 곳이라면 산간벽지 오지마을도 마다하지 않았다.

젊음이 시작되던 날, 방 한 켠의 블랙홀은 십 수 년 동안 나에게 위안과 힘을 주었다. 많이 늙게 될 어느 날, 조로했던 그 형과 블랙홀 공연장에서 만난다면, 고마웠다고 「깊은 밤의 서정곡」은 정말 아름다웠다고 말해주고 싶다.

** 대전시민아카데미 10월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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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스래쉬 2011/09/21 21:57 # 삭제 답글

    크.... 굉장한 글입니다. 오랜만에 블랙홀 음반들을 꺼내봐야겠네요. 잘 보고 갑니다. 꾸벅
  • 음반수집가 2011/09/22 02:37 #

    모처럼 즐겁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 vivi 2011/10/27 10:31 # 삭제 답글

    정작 블랙홀 팬카페 회원인 저는 이런 멋진 글을 못 쓸 거 같은데 .....님의 글 멋집니다. ...
  • 음반수집가 2011/10/27 15:59 #

    저도 유령회원입니다. ^^
    감사합니다.
  • 무소유 2014/02/12 09:26 # 삭제 답글

    블랙홀 사랑이 한가득 느껴집니다.
  • 음반수집가 2014/03/21 15:01 #

    이제야 Hope 구입했습니다. 블랙홀 좋아합니다. ^^
  • 無長亦無短 2015/01/15 17:01 # 답글

    얼마 전부터 '달빛 아래 홀로 걷다'를 계속 듣다가 이번 기회에

    블랙홀 전집을 듣기로 맘 먹고 듣다가 포스팅을 접했습니다.

    글 잘 봤습니다. 다른 글도 살펴보고 가겠습니다
  • 음반수집가 2015/02/04 11:32 #

    답글이 아주 늦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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