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미 핸드릭스 이후 일렉트릭 기타가 주연이 된 적은 거의 없었다. 에릭 클랩튼, 제프 벡, 지미 페이지, 리치 블랙모어, 에드워드 벤 해일런 같은 명장들이 그 자리를 노렸지만 기타 연주의 일대 전환을 가져오지는 못했다. 우리나라에도 신중현이라는 거장이 있었지만 그의 실험성보다는 그가 배출한 가수들의 노래만 주목받았다.
1984년 대중음악계에 일대 혁명이 불어온다. 바로 잉베이 맘스틴의 출현이다. 락에 클래식을 접목시킨 그의 『Rising Force』는 일렉트릭 기타가 곡의 주가 됐고 방법은 현란한 속주론이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시도된 적이 없는 사건이었다. 세계는 잉베이 맘스틴의 연주에 경악했고, 한때나마 기타리스트와 기타 키드들에게 잉베이 맘스틴의 연주는 선망이 되었다.
국내에서도 김태원과 김도균, 배재범을 비롯한 많이 이들이 잉베이식 속주를 시도했지만 그네들의 세련된 음감과는 애초 비교불가였고, 녹음기술의 한계가 있었다. 기타리스트의 색깔보다는 누가 멜로디컬하게 ‘빨리 치나’의 장에 불과했다.
8년이라는 가위눌림을 지나 90년대 초반 이현석이라는 생소한 뮤지션이 등장한다. 그의 연주는 잉베이 맘스틴을 연상시켰고, 「Sky High」는 「Far Beyond The Sun」에 비견되는 놀라운 광경이었다.
이현석의 연주는 빠르고 어려운 주법을 사용했지만 정교했고 대중적이었다. 이현석은 바로크 메탈이라는 특정 장르에서 벗어나 모방에 머물지 않고 김태원의 증언처럼 “한국적인 스타일에 맞춘 음악을 지향”했다. 이는 그가 꾸준히 부클릿에 감사의 대상으로 삼는 김수철과 송골매의 명기를 봐도 알 수 있다.
『1집』에서 이현석은 「Sky High」 단 한곡만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여과 없이 드러낸다. 곧이어 발표된 『2집』 수록곡들은 각종 프로그램의 배경음악으로 쓰였고, 「학창 시절」은 〈가요톱텐〉에 등장하는 기염을 토한다. 이현석의 『2집』은 어느 한 곳 나무랄 데 없는 앨범이었고 당당히 성공을 이끌어 낸다.
1, 2집의 성과에 자신감을 얻어 발표한 『3집』은 1시간 가까운 러닝타임에, 14곡을 수록하지만 이게 과도했다. 좋은 멜로디는 여전했고, 공격적인 리메이크 「세상만사」가 앨범을 요약하지만 기존과 같은 패턴이었고 식상했다.
이현석은 3년 후, 절치부심 끝에 98년 비극의 상흔(어머님의 귀천)을 담은 『4집』을 발표한다. 『4집』은 그에게 명성을 가져다 준 『2집』에 버금갔지만 IMF와 인디의 득세로 인해 대중의 관심 밖으로 밀려난다. 특히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은 묻히기에는 아까운 곡이었다.
이현석은 3, 4집의 실패(?)를 성찰하고 자신의 음악에 변화를 준다. 99년 이현석 프로젝트를 결성, 그간 약점으로 지목되었던 보컬 자리에 김성은을 영입하고, 밴드체제로 팀을 재정비한다. 메시지는 대중성보다는 사회비판을 담았다. 이게 의외의 장면이다.
성공 관행보다는 오히려 초심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한다. 그의 자존심과 음악에 대한 열정을 볼 수 있는 좋은 대목이다. 그는 실패하더라도 비켜가려 하지 않았다. 아이러니를 담은 「스타가 되기까지」는 너무도 훌륭했다.
21세기 들어서 사람들은 더 이상 속주나 잉베이 맘스틴을 언급하지 않았고, 이현석은 잊혀져 갔다. 재능 있던 뮤지션의 몰락은 현실에서 비일비재하다.

하지만 이현석이 더없이 그리웠던 건 음악에 대한 자세 때문이었다. 그는 현란한 기능보다는 대중이 공감할 수 있는 음악을 지향했고, 과장하기 보다는 정직한 소리를 담으려 노력했다. 그에게 기타는 자신의 말이었고 존재 증명 이유였을 뿐이다.
2005년 드디어 이현석은 “Come Back"한다. 돌아온 이현석은 깊어졌고, 자신 신념에 가득 찼다. 이현석 프로젝트에서 보였던 사회 인식은 더욱 날을 세웠고 날카로워졌다.
「위험한 댄스」, 「안녕히 가세요」, 「일등」, 「서울로」, 「욕망은 달린다」에서 이현석은 대한민국 곳곳의 부조리를 파헤쳤고, 그간 그를 기다려온 팬들에게 변함없는 이현석식 연주곡 「Asian Power」와 「위풍당당 행진곡」을 헌사 한다.
세월은 이현석에서 좌절보다는 음악의 확신을 강화했고, 성공에 대한 조급증보다는 연륜을 선사했다. 그의 5집 『Myself』는 변함없는 스스로의 약속이었다.
신대철은 한국에서 기타리스트가 솔로로 활동하는 어려움이 얼마나 힘든지 토로한 적이 있었다. 기껏해야 연주인으로 앨범 한 장 낼 수 있는 풍토에서 이현석은 10년 이상을 견디어냈고, 6장의 적지 않은 앨범을 발표했다.
이현석의 일관된 고백은 장인의 모습처럼 장엄하다. 그는 「My Self」를 연주하며 "언제나 기타리스트로 평생을 다할" 다짐을 한다. 비록 현실은 비루하지만 이현석이 펼치던 정면승부는 우리가 어떻게 세상을 살아야하는지 본 모습을 제대로 보여준다.
덧글
얼마전 우연히 1집을 CD로 구하게 되었는데 옛날 생각 참 많이 나더군요 허허허..
여담이지만, 친구들에게 처음 이현석 2집을 보여줬을 때 친구들의 반응은.. '아.. 0.3초 서태지...'였습니다..ㅡ.,ㅡ;
변함없는 평균이상의 음악을 하는 이현석이 좋습니다.
새로운 앨범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습니다. ^^
언제 홍대 스카이하이 방문 꼭 가보려 합니다.
(이현석씨가 운영하는 곳이라 합니다)
이런 종류의 기타리스트들이 오래 가지 못하는 이유는, 결국 연주보다 작곡을 위한 창의력이 떨어지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학창 시절 따위의 곡들로 인기를 얻기는 했지만, 본인의 정체성을 위해서는 더 길게 보고 노래를 하지 않았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3집의 노래는 뭐랄까 거의 못 들어줄 수준이었으니까요. 노래를 잘 부르는 것도 아니었고.
덧글을 보니 애증이 대단하시네요. ^^
그래도 참 좋아하는 뮤지션입니다.
다이고로님 말씀대로 홍대 근처에서 스카이하이를 운영하고 있고요.
http://cafe.daum.net/clubskyhigh
관심 있으시면 위 카페 참조하세요.
어렸을 때 어떤 가수 좋아하냐고 물어보면 아무도 몰라도 꿋꿋하게
'이현석 알아? 있어... 전에 학창시절이란 노래 부르고 기타치던 사람.'
그랬는데... 확실히 3집 이후로는 음반 구하기도 힘들고 소식 접하기도
어려워지더군요. 윗분 말대로 김경호씨의 공연에서나 가끔 보였을 뿐...
아쉬워요~ 김태원씨처럼 화려한 부활을 꿈꾸는 건 무리일까요? ㅠㅠ
김태원보다도 더 멋지게 부활하실 거애요.
저도 글쓰며 좋은 시간 가졌습니다.
특히 연주자로서 솔로앨범을 낸다는 것은 죽이는 일일텐데 말이죠.
연주자 본인에게나 한국의 음반시장에게나.
여하튼 우리 음악에 한 부분을 차지하는 기타리스트이니까요.
3집까지만 테이프로 가지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플레이어도 없고 테이프를 하도 들어서 늘어날대로 늘어나 무용지물이겠지만..ㅜㅡ
2005년에 나온 5집은 지금도 구매가능합니다. ^^
http://cafe.daum.net/clubskyhigh
한번 방문해 보세요.
김경호씨도 무명일 때(데뷔앨범 나오기 전) 이현석씨 콘서트에 게스트로 나왔더랬죠...
그때는 김경호씨도 머리 짧고, 발목까지 오는 청바지입은 순수(?) 한 청년이였는데...
외모와 어울리지 않게 마지막기도 부를 때는... 소름이 쫙~
(곧 첫앨범 나옵니다... 어쩌고 했던 기억이....)
이현석씨는 간혹 라디오에 게스트로 출연도 하시더니...
정말 요즘은 뭐하시는걸까요?
http://cafe.daum.net/clubskyhigh
참조하세요. ^^
이런이런.... 이미 몇년전 서울 생활을 접고 부산으로 오긴 했지만...
약도보고 깜짝 놀랐다는...
계속계속 오래 살아볼 걸 그랬나봐요... 엉엉엉
너무 안타까워 마세요. ^^
지.못.미. 이현석 ㅜ_ㅜ
http://cafe.daum.net/clubskyhigh
근황이 정말 궁금했는데 홍대에 라이브클럽 운영중이시더군요.
직접 무대에 오르기도 하십니다. 물론 그때 가서 봤구요.
외모도 실력도 뭐 벤자민버튼입니다.
1집 CD를 가져가서 사인을 받으려고 했더니
"아니! 이 귀한걸!!!" ㅋㅋㅋ 감자탕집이나 삼겹살집이 아닌
라이브 클럽에서의 재회여서 반가웠습니다.
언제 한번 꼭 같이 가요.
저도 사인 받을랍니다.
저도 어린 시절에 그 분 연주로 불태웠던 시절이 있었군요...;;;
저도 새삼 추억이 새록거립니다.
단,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언급되어 있는 잉위나 토니 역시 3~4장 이외에
명반이라 칭할 만한 음반이 적으므로 특히 토니는 1장정도.. 에 비교하여
이현석씨의 초기 3장은 국내 여건을 고려했을때 전혀 밀리지 않는
연주자였다고 외치고 싶습니다..^^
무척 재미있을 듯 싶습니다. ㅋ~~
잘 됐네요.
저는 4집이나 프로젝트 앨범 꽤 좋아했습니다.
즐감하세요. ^^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메틀팬에겐 심심했고, 가요팬에겐 요상하달까요. (웃음)
그나저나 그놈의 이집만 없어서. 아, 오집도 없긴 하군요. ;;
힘주시는 말씀 감사합니다.
가만히 외쳐봅니다. 이현석 화이팅~
요새 머하시는지.. 정말 궁금합니다.
Youtube에서도 동영상이 너무 없네요..후..-_-;
p.s근황이 궁금해 찾다가 들려 글남깁니다..^^;
2. 홍대에서 라이브 카페 운영하고 계십니다.
다음 앨범 준비중이시고 스카이하이클럽에서 80's night 이란 이벤트로 한달내지두달에 한번 무대에서 연주하고 계십니다. 클럽을 방문해주세요~
1월 기쁜 마음으로 가다립니다.
다시 한번 고개 숙입니다.
여전히 카리스마있는 연주는 완전 감동이였어요.
빨리 다시 활동을 하셨으면....
계속 활동 중이십니다. 다만, 왕성하지 않을 뿐이죠.
앨범 많이 사고, 공연장 자주 찾으면 활동 또한 잦아지겠죠.
전음악에 대해 잘모르지만..
처음듣는순간부터 지금까지 쭉 팬이되었답니다.
어쩜 기타소리가 저렇게 맑고 깔끔하고 귀에 쏙쏙들어오는지..
락이나 메탈을 모르던제게 참 신선한 음악이었던거같습니다.
아직도 그의 기타소리는 다른사람들과 분명 차이가 있는 소리인거같습니다.
그가 계속 음악시장에서 앨범을 내고 활동을 할수있게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필요한때인것같습니다..
더불어 이현석의 새앨범 또한 기대해 봅니다.
좋은 정보 감사드려요.
맥락상 오버했습니다.
아주 훌륭한 기타리스트라고 생각합니다.
하이 보다는 연주력을 봤을때 동심의 세계란 곡이
견줄만 하죠.
이현석은 확실히 속주 쪽에서의 정교함은 당시
최고였습니다. 조필성이 스피드는 이현석을 뛰어넘지만 한국최고의 속주기타리스트로 이현석을
꼽는건 맘스틴 처럼 한음한음 정교해서 입니다.
아쉬운건 90년대가 지나 전세계 락음악의 침체가
너무 장기간 이어지고 있고 인제 무슨음악을 들어도
감동이 오지 않는 문제점은 과거의 훌륭한 뮤지션들이 열정을 너무 불태운게 아닌가 싶습니다.
말씀에 일정 부분 동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