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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음반 많이 사는 분..
by 막장버러지 at 12/24 ^^ by 음반수집가 at 12/24 시간 길게 보시고 컬렉팅.. by 음반수집가 at 12/24 ^^ by 히읗 at 12/23 전 올해는.. 비틀스 모노.. by 유투왕빠 at 12/22 1. 먼저 글 주셔 감사합.. by 음반수집가 at 12/22 모든 게 제로섬입니다. .. by 음반수집가 at 12/22 그러네요. 비틀즈의 .. by 음반수집가 at 12/22 박학기 2집은 종종 보이.. by 음반수집가 at 12/22 세상의 모든 음악을 들으.. by 음반수집가 at 12/22 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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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0월 19일
![]() 산울림이 이 땅에 출연한지 30년이 흘렀다. 한 세대가 성장한 긴 시간이지만 산울림의 음악만큼은 변함없이 감동적이다. 유신 말기, 지독한 폭력 속에서도 청춘의 욕망은 음악으로 표출된다. 대학생들이 꼭 데모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걸 증명한 대학가요제와 해변가요제는 수많은 명장들을 탄생시켰다. 그 최고의 수혜자가 송골매였다면, 가요제를 존재케 했던 건 산울림이었다. 김창훈이 만든 「나 어떡해」가 없었다면 2008 대학가요제를 볼 수 있었을까. 「나 어떡해」는 노래 자체를 떠나 청년가요제의 아이콘이 되었고, 산울림은 그 상징의 봉우리였다. 인정하든 않든 간에 음악키드들에게 기타를 잡게 하고, 뮤지션의 길로 인도한 계기는 「나 어떡해」였다. 산울림의 시작은 취미 그 이상의 것도 아니었지만, 신중현 이후 사라졌던 락음악의 고유 창작이 다시 탄생되는 순간이었고, 우리 대중음악의 새로운 혁명이었다. 산울림이 당대 그룹과 달랐던 점은 학교에서 맺은 결연 관계가 아닌 형제간의 혈맹이었다는 점과, 100곡에 가까운 자신들의 창작곡을 데뷔 이전에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 차별성은 이들이 지금까지 활동할 수 있는 생명력을 부여한다. 무엇보다 산울림은 오로지 음악을 통해 진검 승부했다. 밤무대나 카피는 산울림의 자부심에 맞지 않았고 앨범과 공연만으로 대중과 소통했다. 산울림은 77년 데뷔 후, 김창훈과 김창익의 입대 전까지(79년 9월)까지 만 2년도 안 되는 기간 동안 정규앨범 5장, 한 장의 동요앨범, 각종 편집앨범 4장 등 자신들의 이름을 10장의 음반에 올린다. 지금에서 화자 되는 1, 2, 3집은 모두 이 시기의 앨범들이었다. 김창훈이 말한 “평생 100장의 음반을 내는 것”은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공언이 아니었다. 산울림의 음악은 종잡을 수도 규정할 수 없었다. 가사에는 자살과 사랑이 공존했고, 음악은 동요와 헤비메탈을 횡단했다. 산울림만큼 풍부하고 다양한 음악은 산울림 이전에도 이후에도 존재치 않았다. 해외에서 이들의 앨범이 희귀반으로 숭배 받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장르와 표현 불문, 여기에 뛰어난 너무도 뛰어난 음악성은 보편성을 획득하기에 무리가 없었다. ![]() 무지개 닮은 산울림의 음악적 핵은 역시 김창완이다. 야누스의 모습, 김창완이 꼭 그랬다. 김창완은 밴드의 리더이자 형제들의 맏이로 30년이 넘는 동안 산울림을 지켜왔다. 검열 때문에 자살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아니 벌써」, 서른도 되지 않은 사내가 구슬피 읊조린 「청춘」과 마흔이 넘은 나이에 「기타로 오토바이를 타자」는 비상식을 보라. 김창완에게는 표현의 제약이 없었다. 상상한 걸 현실로 만든 아티스트가 바로 김창완이었다. 산울림뿐 아니라 우리 음악사에서 과소평가된 게 또한 김창훈이다. 산울림의 정적인 이미지가 김창완이라면 동적인 주자는 김창훈이었다. 이제는 상식이 된 “위악”의 대명사 「내마음은 황무지」, 거침없는 「이 기쁨」, 달리는 「특급열차」, 「사랑하니까」, 「소낙비」 그리고 처연한 「독백」과 명작 「회상」, 우리나라 가요의 새로운 장을 연 「나 어떡해」와 문제작 「그대는 이미 나」를 모두 만든 이가 김창훈이다. 묻혀버린 그의 명반 『1집 : 요즘 여자』는 어떠한가. 김창훈은 음악 뿐 아니라 프로듀서의 뛰어난 면모도 과시했다. 김완선 1, 2집의 모든 곡을 만들고 속된 말로 그녀를 키웠다. 김완선 하면 요염한 댄스 가수로 치부할 수 있으나 그녀는 신중현, 이장희, 손무현 등의 곡을 직접 받아 부른 만만치 않은 강자다. 생각만 해도 눈물 나는 김창익은 스무 살도 안 된 나이에 산울림에서 드럼 스틱을 잡았다. 김창익의 처음은 어설펐지만 패기 넘쳤고, 군대 시절 군악대를 거치며 일취월장한 모습을 보인다. 산울림의 최고 정점이었던 7, 8, 9집에서 락킹한 그의 연주를 들어보라. 그의 주법은 형제들의 음악에 날개를 달게 한다. 하지만 산울림의 극점은 여기까지였다. 1983년 9집 발표 후, 생계 때문에 김창훈과 김창익 은 산울림을 떠나게 된다. 산울림이라는 이름과 음반 발매량을 생각했을 때 어이가 없지만 진실이다. 7, 80년대 우리나라 뮤지션들이 살아갈 길은 음반 판매량과 공연이 아닌 방송출연과 밤무대 단 두 가지 통로뿐이었다. 이는 내로라하는 작가들이 사라져간 가장 큰 이유로, 방송과 밤무대에서 자신의 말을 꺾기보다는 퇴장을 택한 것이다. 산울림은 그 중심에 바로 서 있었다. 슬픈 건 지금도 이 상황이 유효하다는 점이다. 저작권과 판권의 개념이 어느 정도 정리됐지만 여전히 이 땅의 뮤지션들은 녹음실과 공연장이 아닌, 살기 위해 TV와 행사에서 박박 기고 있다. 1997년은 우리 음악사에 엄청난 해였다. 인디신의 폭발과 우리 고전들의 재발굴과 재평가에 힘입어 산울림은 다시 한 번 『13집』을 들고 우리 대중음악계에 돌아온다. 『12집』 이후 6년만이고, 삼형제의 결합은 『9집』 이후 13년 만이었다. 『13집』은 젊고 직선적이었지만 음악적으로, 상업적으로 실패하고 만다. 그러나 재기작은 이들의 활동에 자신감을 주었고, 지속적인 공연을 벌이며 차기작을 모색하게 만든다. 21세기 들어, 산울림 『14집』발매는 여러 차례 보도됐지만 나온다는 소문만 무성했을 뿐, 연기를 거듭한다. 산울림 데뷔 30주년 공연과 김창완의 신곡을 통해 이들의 신보에 기대감을 갖던 차, 가슴을 찢는 비보가 날아온다. 예기치 못했던 김창익의 죽음이다. 셋째의 죽음으로 산울림의 온전한 『14집』은 결국 꿈으로 끝나고 말았다. ![]() PS 1. 참조 : 산울림의 정규앨범 13장에 담겨 있는 노래는 총 135곡으로 이중 김창훈이 작곡한 노래는 29곡, 김창익이 만든 노래는 2곡이다. 창훈, 창익 형제가 관여하지 않았던 4장(6, 10, 11, 12집)을 제외하면 김창훈은 평균 3~4곡의 곡을 앨범당 제공한 셈이 된다. PS 2. 바램 : 2008년 쟁쟁한 명사들이 하늘로 갔다. 그중에서 가장 아픈 죽음은 김창익이다. 죽은 자를 추모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뮤지션을 추모하는 가장 큰 애도는 그의 음악을 듣는 것이다. 그러나 산울림을 듣고 싶어도 음반이 없는 걸 어떡하누. 절판되고 회수된 산울림의 음반들, 언제 즈음 만나볼 수 있을까. 산울림 음반 재발매 서명운동이라도 하고 싶다. 농담 아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