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음반을 못살지라도 음악이야기


마음이 답답해질 때면 음반을 사며 푼다. 이 공식 참 못됐지만 어쩔 수 없다. 음악을 통해 삶의 활력을 찾는 게 사실이다. 대전에 있는 어지간한 레코드 가게는 모두 찾아다녔다. 그전처럼 음반시장이 활성화돼 있다면 이런 수로로움이 덜할텐데, 시대가 시대니 발품을 팔아야 한다. 이제 레코드 가게는 진귀한 존재가 됐다.

주변 사람들한테 음악 좋아하고, 음반 구입이 취미라는 게 소문이 나, “어떤 이”들은 음반을 기증하고 “다른 이”들은 레코드 가게를 알려준다. 아는 선배 한 분이 부사동 쪽에 음반매장이 있다고 오래전부터 말씀해 주셨는데, 생활과는 동선이 맞지 않아 가지 못하고 있었다. 우울한 어제, 삶에 희열을 주고자 레코드 가게를 찾았다.

매장의 위치가 사무실과는 그리 멀지 않고, 위치가 대로변이라서 찾는 데 애를 먹지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음반 매장은 선배가 말한 곳에 예쁘게 존재했다. 반갑고 설레는 가슴을 안고 가게 문을 열었다. 매장 전경을 보는 순간 “어이쿠”라는 한탄이 흘러나왔다.

CD는 거의 없었고, 있는 음반들도 대부분 최신반이었다. 혹시라도 보물이 숨 쉬고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감으로 자세히 살폈지만 매물이 얼마 되지 않아 아이쇼핑은 1분도 걸리지 않았다.
주인에게 인사하고 매장을 나오니 씁쓸한 웃음이 난다. 뭔가 걸릴 거라는 기대감은 참혹하게 무너졌고, 추운 날씨만큼 요상한 찬물이 내 몸에 흘렀다. 하지만 기분이 마냥 나쁘지는 않더라.

찾아가는 음반 매장마다 원하는 CD를 구하면 얼마나 좋겠냐만서도, 그러면 재미없다. 튕기는 맛도 있어야 하고, 채여도 봐야한다. 그래야 그 대상이 귀한 줄, 좋은 줄 뼈저리게 느낀다. 어째, 표현이 연애 어투다. 심정적으로 내 음반들이 마누라와 서열 1, 2위를 다투니 표현상의 한계는 어쩔 수 없다.

어렸을 때 왜 그리 사고 싶은 음반들이 많았는지. 돈이 있어도 살 수 없는 게 부지기수였다. 지금처럼 인터넷이 활성화돼 앉아서 주문하는 시대가 아니었다. 오로지 발품과 음악잡지를 통해 음반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정보를 얻더라도 서울이 아닌 지역은 매물이 다양하지 않아 신보라 하더라도 유명하지 않으면 살 수 없었고 외국 뮤지션의 음반은 더욱 그랬다. 성격 급한 나이, 레코드 가게 주인에게 주문을 넣고 기다리는 건 몹시도 싫었다. 가끔 서울에 갈 일이 있어, 종로 일대를 누비며 대전에서는 구경도 할 수 없었던 음반을 살 때의 기쁨은 지금도 생생하다.

이제는 시대가 가혹해져, 한국의 음반시장도 궁핍해졌다. 눈길은 자연히 해외로 간다. 그런데, 기분이 더럽다. 글로벌, 다국적, 무국경, 이런 말들이 현시대의 최신 용어고, 국경을 넘나들며 일을 벌이는 게 앞서가는 것 같지만 김수영의 시처럼 “좆”이다.

내 동네에서, 내 나라에서 사고 싶은 CD 한 장 제대로 못 사는 게 발전이고 최첨단인지 되묻고 싶다. 가뜩이나 어려운 지역 경제가 인터넷쇼핑물 때문에 거덜 나고, 영세상인들은 폐업을 선언하고 있다.

그 자리는 자본력이 충실한 대형마트와 대형음식점이 들어와 차지했다. 음반매장도 마찬가지다. 핫트랙스, 신나라레코드 등의 지점들을 제외한 중소 레코드 가게는 문을 닫고 있는 게 현실이다. 2MB시대를 맞아 이 현상은 고착화 될 게 분명하니 한숨이 나온다.

일반 시민들에게 마냥 동네 시장을 다니고,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과외하지 말라는 말은 사기다. 1원이라도 싸고, 내가 편리하고, 내 가족이 잘 되는 게 우선 아닌가.

CD 사는 얘기가 완전히 옆으로 새어버렸다. 말하고 싶은 건, 내 주변의 불편함이 꼭 내 탓만은 아니라는 얘기다. 다른 사람에게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도 피해를 주는 메커니즘이 내 주변에서 작동되고 있다.

음반 한 장 여유롭게 살 수 있는 시대가 저무는가. 앞으로 햇빛 보기가 더욱 힘들 것 같다. 그렇다고 내가 지는 해를 잡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내가 가진 건 너무도 미약하다. 그러니 이 땅의 음반가게가 모두 문을 닫기 전 조금이라도 더 돌아다니자.


※ 김수영, 「거대한 뿌리」
나는 아직도 앉는 법을 모른다
어쩌다 셋이서 술을 마신다 둘은 한 발을 무릎 위에 얹고
도사리지 않는다 나는 어느새 남쪽식으로
도사리고 앉았다 그럴때는 이 둘은 반드시
이북친구들이기 때문에 나는 나의 앉음새를 고친다
8. 15 후에 김병욱이란 시인은 두 발을 뒤로 꼬고
언제나 일본여자처럼 앉아서 변론을 일삼았지만
그는 일본대학에 다니면서 4년동안을 제철회사에서
노동을 한 강자다

나는 이사벨 버드 비숍여사와 연애하고 있다 그녀는
1893년에 조선을 처음 방문한 영국 왕립지학협회 회원이다
그녀는 인경전의 종소리가 울리면 장안의
남자들이 모조리 사라지고 갑자기 부녀자의 세계로
화하는 극적인 서울을 보았다 이 아름다운 시간에는
남자로서 거리를 무단통행할 수 있는 것은 교군꾼,
내시, 외국인의 종놈, 관리들 뿐이었다 그리고
심야에는 여자는 사라지고 남자가 다시 오입을 하러
활보하고 나선다는 이런 기이한 관습을 가진 나라를
세계 다른곳에서는 본 일이 없다고
천하를 호령한 민비는 한번도 장안 외출을 하지 못했다고......

전통은 아무리 더러운 전통이라도 좋다 나는 광화문
네거리에서 시구문의 진창을 연상하고 인환네
처갓집 옆의 지금은 매립한 개울에서 아낙네들이
양잿물 솥에 불을 지피며 빨래하던 시절을 생각하고
이 우울한 시대를 파라다이스처럼 생각한다
버드 비숍여사를 안 뒤부터는 썩어빠진 대한민국이
괴롭지 않다 오히려 황송하다 역사는 아무리
더러운 역사라도 좋다
진창은 아무리 더러운 진창이라도 좋다
나에게 놋주발보다도 더 쨍쨍 울리는 추억이
있는 한 인간은 영원하고 사랑도 그렇다

비숍 여사와 연애를 하고 있는 동안에는 진보주의자와
사회주의자는 네에미 씹이다 통일도 중립도 개좆이다
역사도 심오도 학구도 체면도 인습도 치안국
으로 가라 동양척식회사, 일본영사관, 대한민국 관리,
아이스크림은 미국놈 좆대강이나 빨아라 그러나
요강, 망건, 장죽, 종묘상, 장전, 구리개 약방, 신전,
피혁점, 곰보, 애꾸, 애 못 낳는 여자, 무식쟁이,
이 모든 무수한 반동이 좋다
이 땅에 발을 붙이기 위해서는
제3인도교의 물 속에 박은 철근 기둥도 내가 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좀벌레의 솜털
내가 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괴기영화의 맘모스를 연상시키는
까치도 까마귀도 응접을 못하는 시꺼먼 가지를 가진
나도 감히 상상을 못하는 거대한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덧글

  • 술과고기 2008/01/17 15:43 # 답글

    지키고자하는 결의가 엿보이네요...
  • ultrafunk 2008/01/17 16:30 # 답글

    방문하신 레코드가게가 부사동 사거리에 있는...가게 외벽이 목제로 되어있는 가게 아닌지요? 아담한 사이즈의 가게이면서 담배도 파는...작년에 들러서 사고싶은 CD가 없어 담배만 사고나온 적이 있습니다. 외가집이 근처라서요^^;
  • 음반수집가 2008/01/17 18:18 # 답글

    술과고기 // 습관이 돼서 레코드가게 탐방은 계속 될 것 같습니다.

    ultrafunk // 대전에서 ultrafunk님 무서워 사기도 못치겠습니다. 예, 바로 그 매장 맞습니다. 언제 한번 번개해야겠네요. ^^
  • DarthSage 2008/01/17 21:17 # 답글

    인터넷의 발달이 오프라인 쇼핑의 재미를 앗아간게지요. 안타까운 부분 중 하나입니다. 직접 눈으로 보고 사는 재미가 참 좋은데 말이죠 :)
  • 은비뫼 2008/01/17 22:56 # 답글

    김수영의 시와 음반매장에 관한 글이 묘하게 어울리네요.
    수집가님의 레코드가게 탐방이 언제까지나 이어지시길.
    저도 서점을 비롯해 헌책방, 북카페 등을 자주 가고 싶은데 인터넷 서점을
    많이 이용하네요. 에구.
  • 음반수집가 2008/01/18 09:27 # 답글

    DarthSage // 예, 아무래도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는 행위가 중요하죠. 이점이 없어져가는 게 장말 아쉽습니다.

    은비뫼 // 내가 먼저 살아야, 옆에게 보이는 할 수 없죠. 현실의 딜레마입니다. ^^
  • Rosa 2008/01/18 13:49 # 답글

    견물 생심이라고 예전엔 지나가다가도 한장씩 사곤 했는데, 눈에 안보이니 자연 멀어지는군요..재료상에 가기 바쁜거죠..요샌 그저 라디오에 의존해서 살고 있는 형편이다보니..언제 부턴가 그리되고 마네요..이제 또 초심을 찾아야죠..홧팅...
  • 젊은미소 2008/01/18 14:45 # 답글

    손으로 하나씩 넘겨 보면서 어느 걸로 골라볼까 하는 그 즐거움.. LP쪽이 CD보다 훨씬 "손맛"이 좋았지만 결국은 CD로 넘어 갔듯이 CD도 종국에는 디지털 다운로드에 자리를 잃어가는 것 같습니다.

    미국도 월마트 등등의 대형 매장이 음반 판매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데요.. 요즘 보면 CD 전시 공간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는 추세가 느껴집니다. 음반을 고르고 있는 사람수도 예전보다 많이 적고요. DVD나 비디오 게임 쪽의 활발함과 상당히 비교가 됩니다. 상당히 구식으로 음악 듣는 스타일인 저도 인터넷을 통해서 저렴하게 구입하는 쪽으로 돌아선지 오래되었으니 말이죠.
  • 총천연색 2008/01/18 23:03 # 답글

    LP의 숨소리란 걸 접해보고 싶어요.
    미천한 경험에 한꺼풀 덧씌우고 싶네요.

    시는 강렬하네요.
    정말.

    저도 동참해서 조금 더 돌아다니겠습니다.
  • 음반수집가 2008/01/20 23:11 # 답글

    Rosa // 그래도 되세요. 애정이 있으면 언제고 베풀더군요. Rosa님 삶이 훌륭하시니 너무 부담갖지 마세요.

    젊은미소 // LP의 맛에 비할까요. ^^ 여하튼 음반이 사라지지만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려면 세월이 한세월이니 걱정보다는 있는 음반들이나 잘 구해야겠네요.

    총천연색 // 예, 같이 좋은 음악 계속 찾아보죠. 좋은 한 주 되십시오.
  • giantroot 2008/01/22 16:25 # 삭제 답글

    제가 10살 정도쯤 동네에 레코드점이 하나 있어서, 초 기대하면서 갔지만 거기엔 제가 원하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 상당히 실망하면서 나온 적 있었습니다. 반대로 중1때 어느 백화점 레코드점에서 델리스파이스 1집 초판을 기쁘게 구입하던 때도 생각나네요. (참고로 저는 지금 졸업을 앞둔 고3입니다;)

    이젠 인터넷으로 주문하긴 하지만... 그래도 음반을 사는것은 제 즐거움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것도 불법 복제 때문에 얼마 남지 않았다니 슬프고 화가 나네요. 즐거움 하나가 사라지는 느낌입니다.

    참, 제 아이디는 바로 김수영의 [거대한 뿌리]에서 따온 것입니다. 여기서 이 시를 보니 반갑네요^^
  • 음반수집가 2008/01/22 16:26 # 답글

    giantroot님이 경제적으로 자유로울 때, 음반을 자유롭게 고를 수 있어야할텐데요. 솔직히 암울한 게 사실입니다. 그래도 부자가 망해도 3년은 간다고 금새 음반이 없어지지는 않겠죠. 노여움 푸시고요. 즐거운 학창생활 되시길 바랍니다.

    김수영을 좋아하시니 저 또한 무지 반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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